토끼와 옹달샘 이야기
토끼와 옹달샘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머루랑 다래랑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행운을 만날 때가 있다고들 합니다. 로또 1등의 행운은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천운(天運)이겠지만, 인기 높은 아파트 입주권에 당첨된 행운은 주변에서도 자주 들립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기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행운의 기억을 찾으려 애를 쓸수록 억세게 운이 나빴던 기억들이 먼저 일어섭니다. 그랬던 내가 이곳 ‘토끼와 옹달샘’에서 큰 행운을 만났습니다.
덩치 큰 자연석들이 물 흐르듯 펼쳐지는 뒷산 공간을 돌 계곡이라고 부릅니다. 무더위가 시작될 무렵, 근처에서 제초 작업을 하던 직원이 멀리 돌 계곡 중간에 있던 산수유나무를 바라봅니다. 먼발치였지만 나무에서 얼핏 얼핏 송이 열매 같은 것이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시선을 거두고 맙니다. 산수유나무에 송이 열매가 열릴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커다란 돌들을 딛고 가서 나무를 확인하기는 너무 위험했습니다. 그것이 송이 열매일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여름이 되면서 열매가 커지고 형체가 뚜렷해지자 그 직원은 그곳에 예사롭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돌 계곡으로 들어섰지만, 아마 당시는 암벽 등반을 하듯이 기어가야 했을 겁니다. 그만큼 그곳은 사람이 다니기에는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겨우 나무 곁으로 다가선 직원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산수유나무에 머루 송이가 빽빽하게 달려 있었습니다. 뒤엉킨 잎들을 정리하고서야 그 사정을 알 수 있었습니다. 머루나무가 산수유나무를 휘감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발견한 건 머루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주변에는 다래나무도 여러 그루 있었습니다.
직원이 굳이 전화로 급하게 소식을 알린 데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결코 실현하기 어려운 꿈이었지만, 나는 연수원의 환경이 어릴 적 강원도 두메산골의 뒷동산과 같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고스란히 옮겨 놓으려 애썼습니다. 조그만 산길도 그때의 기억으로 만들었고, 옹달샘도 그때 보았던 산속의 샘물을 본떠 다듬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 두메산골에 지천으로 널려있던 열매들을 여기서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산딸기는 여기저기에 자생하고 있었지만 넓은 산을 다 뒤져보아도 머루와 다래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겨우 대나무 산책로에서 찾은 다래는 이제 갓 줄기가 만들어진 어린 순에 불과했고, 돌 계곡 쉼터에서 발견한 머루나무는 기력이 다해 가녀린 줄기 하나만이 남겨진 상태였습니다. 나는 그것들이라도 살려보려고 부단히 애썼습니다. 그러나 큰 생강나무 그늘에 있던 머루나무는 햇볕마저 받지 못하는 처지여서 곧 생육 관리를 포기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런 나의 간절함을 알고 있었기에 직원은 내가 연수원을 방문할 때까지 기다리기가 어려웠던 겁니다.
한달음으로 연수원에 도착했을 때, 직원은 이미 산수유에서 머루나무를 걷어내고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엄청나게 컸습니다. 돌 계곡 상부를 다 덮을 만큼 가지가 풍성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많은 머루 가지들이 한 줄기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주변의 다래나무까지 키대로 펼치면 머루와 다래가 돌 계곡 전체를 덮을 정도였습니다. 70 평생을 시골지기로 지냈던 직원은 그들의 수령이 족히 120년은 넘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그리고 한줄기에서 그렇게 많은 머루 가지가 자란 것은 처음 본다며 놀라워했습니다.
그해 여름, 나는 거의 매일같이 머루와 다래나무를 살폈습니다. 내심으로는 ‘CEO가 회사 일보다 머루, 다래나무에 더 신경을 써도 되나?’라는 걱정이 들 정도였으니 당시의 흥분과 애착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될 겁니다. 그러나 열매 수확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잎이 풍성한 가지들이 돌 위에 놓여있어 통풍이 되지 않았고 일조량도 적었습니다. 돌덩이가 뿜어내는 복사열에 잎사귀가 마르고 열매가 상하기도 했습니다.
이듬해에 파고라를 세워 머루나무 줄기를 들어 올렸습니다. 큰 돌덩이 사이로 구조물을 세우는 작업은 힘들고 위험했습니다. 그 옆으로 길을 만드는 과정은 더 어려웠습니다. 장비가 들어갈 수 없는 여건 때문에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큰 돌들을 옮겨야 했습니다. 채산성으로 본다면 틀림없이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그러나 길이 있어야만 머루나무를 보살피고 열매를 볼 수 있었기에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돌길을 만드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습니다.
다행히 그 이후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열매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후회도 깊었고 비난도 많았을 겁니다. 간혹 방문객 중에는 돌 무리 속에서 나무가 어떻게 자라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는 돌 아래를 흐르는 계곡물로 설명하곤 합니다.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돌 계곡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여름 장마철이면 그 소리는 더 우렁차게 울립니다. 예전에는 물길이 현재의 ‘물레방아’와 ‘고전문학 방갈로’를 거치는 계곡으로 흘렀다고 합니다. 그 물길이 머루와 다래의 생육에 필요한 습한 조건을 만들고 있을 겁니다.
매년 봄이면 어김없이 머루 순이 올라옵니다. 그리고 실록과 함께 솜털 뽀송한 잎이 자라고, 그 사이로 덩굴손이 뻗어납니다. 곧이어 갓난애기의 손같이 맑고 투명한 애기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한여름이 되면 늘어난 잎들이 겹치고 겹치면서 햇빛을 차단합니다. 그 모습이 흡사 아기를 안는 엄마의 품처럼 정겹습니다. 나는 그 속에 안긴 연초록빛 머루 송이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비 개인 날 물기를 머금은 머루는 더 청초합니다. 이미 다 커버린 머루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빛이 그 위로 떨어집니다. 초록색 물방울들이 조각 빛에 영롱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곳에서 행운을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이곳을 ‘머루랑 다래랑’으로 부를 수 있는 것도 행운입니다. 머루가 없었으면 ‘다래밭’으로 불렀을 것이고 다래가 없었다면 ‘머루밭’쯤으로 불러야 했을 겁니다. 사람이든 나무든 같이 있어야 정겹습니다. 지금은 돌 계곡 가까운 곳까지 길을 만들어 그들이 어우러진 모습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자주 돌 계곡 쉼터에서 그들을 내려다봅니다. 고려 시대, 지금까지 미상(未詳)의 작가로 알려진 그분이 여기에 왔었다면 아마 이곳에서 청산별곡을 읊었을 겁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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