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와 옹달샘 이야기
토끼와 옹달샘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진달래 동산-우리를 좀 봐 주세요!
진달래는 김소월님의 시로 더욱 잘 알려진 꽃입니다. 현대 시 중 최고의 이별 미학을 표현한 것으로 칭송을 받는 ‘진달래꽃’은, 이별의 고통과 슬픔을 서정적 자아로 승화시킨 옛 여인들의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사랑을 그린 시로 인식 되고 있습니다. 故 박두진 시인께서는 ‘처절한 사랑의 자기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인고의 마음이 완벽하리만큼 깊고, 맵고, 서럽게 표현된 시' 로 극찬했다고 합니다.
토끼와 옹달샘 등산로 입구에 소월님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진달래 숲이 있습니다. 8년전 4월 초. 뒷산에 등산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지금의 개나리 산책로를 돌아 산등성이로 들어서려는데 당시는 정리되지 않았던 숲 덤불 사이로 붉은 빛조각들이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덤불을 헤치고 소나무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 흔히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가슴 벅찬 감동의 순간에 직면했었지요. 마침 소나무 숲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봄 햇살 아래로 연분홍 진달래 숲이 펼쳐졌습니다.
햇볕에 부딪쳐 갖가지 형색의 분홍빛을 뿜어내던 진달래 숲이, 마치 “우리가 여기 있어요. 우리 좀 봐 주세요!”라고 일제히 함성을 지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내가 그들의 모습에서 그런 외침을 들었던 것은, 그곳이 8년 동안 자연 상태로 방치되었다는 전 주인의 전언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 전언에 따르면, 적어도 8년 동안은 그 누구도 진달래 숲의 존재를 몰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알았다고 해도 굳이 찾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름난 진달래 군락지에 비하면 그곳은 그야말로 작고 보잘 것 없는 규모였기 때문입니다.
8년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기다려 왔던 진달래 숲은, 소나무와 잡목들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서둘러 햇볕이 잘 들도록 잡목들을 정리하고 그 사이로 등산로 입구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오래 머물 수 있도록 작은 쉼터를 만들어 의자도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런 각별함 때문이었는지 처음엔 ‘진달래 숲’이라고 붙였던 명칭을 이후 ‘진달래 동산’으로 바꾸었습니다. 동산이라는 명칭이 더 예쁘고 멋있다고 생각했었지요.
올봄, 연수원을 찾은 친구들에게 진달래가 피었는지 올라가 보자고 했더니, 짓궂은 녀석이 한마디 했습니다.
“매년 피는 꽃이 기다려 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데, 그만큼 우리 나이가 들어가는 건 어쩌면 좋으냐......”
참으로 멋없고, 모질고, 서글픈, 그렇다고 부인할 수도 없는 푸념이 있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내년 봄에도 몇 번이고 그곳에 올라 진달래가 피었는지 확인할 것 같습니다.
진달래도 개나리와 같이, 꽃이 주는 화사한 이미지와는 다른, 아주 슬픈 사연을 지니고 있습니다.
진달래를 두견화, 접동새를 두견새라고도 하는 데, 거기에는 옛날 중국 촉(蜀)나라의 임금, 망제(望帝)의 애달픈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망제의 이름은 두우(杜宇)였습니다. 위(魏)나라에 망한 후, 그는 어쩔 수 없이 도망을 치는 몸이 되었지만 항상 복위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억울하게 죽어 그 넋이 두견새가 되었다고 합니다. 임금 망제의 한을 간직한 두견새는 밤이고 낮이고 "귀촉, 귀촉(고향 ‘촉’으로 돌아가고 싶다)" 소리를 내며 울었는데, 그래서 두견새를 귀촉도(歸蜀道)라고도 부릅니다.
한이 깊어지면서 급기야 두견새는 피를 토하게 되었답니다. 그 한 맺힌 피가 뿌리로 스며들고, 꽃잎을 적셔 진달래꽃이 붉어졌고, 진달래를 두견화로도 부르게 된 연유가 되었습니다. 당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산석류, 원구에게 붙인다(山石榴, 寄元九)〉라는 시에는 "두견새가 한번 울 때마다 두견화가 한 가지씩 핀다(一聲催得一枝開)"는 구절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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