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와 옹달샘 이야기
토끼와 옹달샘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낙엽을 쓸지 마세요.
아침 산책에 나서려니 본관, 별관 마당 가득히 낙엽이 날리고 있습니다.
본관 앞마당엔 도토리나무와 벚나무 잎이, 별관 마당엔 단풍나무와 버드나무 잎이 떨어져 있습니다.
정문 옆으로 커다란 오동잎도 보이고, 목련도 여름 동안의 소박했던 열정을 연못 가득 털어놓았습니다.
별관 길을 올라, 방갈로를 돌아서니 누런 감나무 잎도 여기저기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그 옆의 고추 텃밭엔 말라드는 고추나무에 새빨간 고추가 힘겹게 매달려 있습니다.
아직 따지 않은 깻잎이 새벽바람에 떨고 4년 전 심어 놓았던, 물레방아 위의 작은 단풍나무도 어느새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가을입니다.
닭장 앞에선 떨어진 도토리 알들이 예쁜 소리로 밟히고, 여기저기 밤 껍질이 뒹굴고 있습니다.
혹시나 밤이 들었을까 운동화 끝으로 비벼보지만 한 톨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람쥐 녀석들의 소행이 틀림없습니다.
인기척이 나자 횃대에 앉아 있던 닭들이 우르르 날아 내립니다.
방금 전까지 우렁찬 목소리로 새벽잠을 깨운 녀석이 누구일까 찾아보지만 녀석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딴청을 부릴 뿐입니다.
개나리 산책로를 지나, 진달래 동산에 오르고서야 멀리서 동이 터 옵니다.
여기보다 한참이나 높은 윗마을엔 이미 햇볕더미가 삐죽하게 걸려 있습니다.
등산로 쉼터에도 참나무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습니다.
산 위에서 한 무리의 새벽바람이 내려옵니다.
오리나무가 한바탕 몸부림을 치더니, 작은 잎들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오리나무에서는 벌써 겨울 냄새가 납니다.
바람을 피해 돌아서니 옆 산 바위전망대 주변이 만산홍엽(滿山紅葉)입니다.
마침 전해진 햇살과, 그 뒤, 시리도록 파란 하늘 때문에 빨간 단풍색이 더욱 선명합니다.
그런 모습 때문인지 많은 이들이 단풍을 정열에 비유합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그 앞에 ‘중년’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게 더 적절하리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단풍은 중년의 정열’
얼마 전 이곳에 들렀던 친구 녀석들에게 그런 내 생각을 전했더니 한 녀석이 “우리는 중년이냐, 노년이냐?”라고 묻습니다.
50대 중반이면 중년이라는 녀석과, 당연히 노년이라는 짓궂은 녀석이 있었는데, 압권은 ‘100세 시대에 50대는 새파란 청년’이라고 우기는 녀석이었습니다.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하면서도 50대 중반의 사내들은, 내심 ‘그럴 수도 있겠다’는 억지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정열’이라는 단어에서는 강렬한 힘과 희망이 전달되지만, ‘중년의 정열’에서는 왠지 쓸쓸함과 한계, 그리고 아쉬움이 같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정겨움도 있지요.
정겨움은 숱한 사연과 상처의 흔적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애증과 같은 것일 겁니다.
진달래 바위의 오솔길을 내려서며, 아마도 그런 느낌은 순전히 낙엽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단풍은 낙엽을 예고합니다.
화려함의 끝자락에 잔잔한 우수(憂愁)와 아쉬움이 매달려 있습니다.
딸기 산책로를 걸어 옹달샘 큰길가로 내려서니 한바탕 소슬 바람이 입니다.
한 걸음 두 걸음 바람에 밀려가던 낙엽들이, 더 뒷걸음질을 칠 형편이 되지 않자, 산책로로 이어지는 돌 축담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앉습니다.
그 곳엔 이미 여러 종류의 낙엽들이 모여 있습니다.
아마도 봄부터의 사연을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모습이 정겹기도 하고 쓸쓸해 보이기도 합니다.
한시(漢詩) 강좌에 다녀온 아내가 좋은 글귀를 전해 준 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태어나서,
현자(賢者)를 만나기 위해 살다가,
아름다움을 남기기 위해 죽는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낙엽을 보며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허전함과 공허함이 더 친숙합니다.
정겹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래서 낙엽을 ‘노년의 정겨움’ 정도로 정리하려 애쓰는 수준입니다.
내 생애의 노년이 정겨울 수만 있어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생애(生涯) 행복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노년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고, 그러기도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년 가을에는 내가 남겨야 할 노년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기로 합니다.
별관 마당에 도착하니 낙엽이 보이지 않습니다. 본관 마당도 말끔합니다.
직원분이 부지런히 낙엽을 쓸고 계십니다.
급히 만나 이렇게까지 쓸어 낼 필요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방문객이 있고, 비가 오면 추해지니 치울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마당만 쓸고 그 이상은 그냥 두라고 당부 드립니다.
그래도 가을엔 여기저기에 낙엽이 뒹굴어야 계절의 정취가 납니다.
그리고......
낙엽이 정겨워야 우리네 노년도 정겨울 수 있습니다.
낙엽을 쓸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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